2.5세대 아이돌이 한창 활동하고 3세대 아이돌이 데뷔하던 때는 나의 덕질 전성기였다. 한 분야에 빠지면 갈 때까지 가보자는 기분으로 파고드는 성격 덕분에 4세대 아이돌이 등장한 지금까지 수많은 아이돌 그룹에 발가락 정도는 담그고 있지만, 여전히 가장 열정적이었던 덕질 전성기는 2.5세대와 3세대 아이돌 그 어딘 가에 멈춰 있다.
하지만 현실의 시간은 조금씩 흘러갔다. 아이돌 세대 교체, 서바이벌 프로그램과 파생 그룹들, 영향력 있는신흥 기획사들의 등장, 한류의 확산으로 새로운 아이돌 덕질 문화가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21세기답게 변화하는 기술에 따라 덕질하는 기기와 매체가 변하면서 아이돌 덕질에도 새로운 기술들이 적용되었다. 아직 2.5세대와 3세대에 마음이 머물러 있는 사람으로서 그 시절과 비교해 최근의 놀라웠던 변화들을 짚어보고자 한다.
1. 키트 (KiT)
©위드드라마
2.5세대 아이돌을 좋아했던 사람들에게 키트 앨범, 키트 비디오라는 말은 생소할 것이다. 키트(KiT)란 ‘Keep in Touch’의 줄임말로 새로운 음반매체이다. 아이돌 팬들에게는 키트를 만든 회사의 이름을 딴 ‘키노(Kihno) 앨범’으로 더 유명한 키트 앨범은 2014년 걸스데이의 <보고싶어> 앨범을 시작으로 케이팝 시장에 처음 등장했다. 앨범 뿐만 아니라 콘서트 등 각종 영상과 비디오도 키트로 발매되는데, 케이팝의 첫 키트 비디오는 2018년 레드벨벳의 콘서트 비디오 <Red Room>이다. 필자가 처음 접한 키트 플레이어는 2020년에 발매된 남우현의 솔로 콘서트 비디오 <식목일2>였는데, 이미 2014년부터 꾸준히 키트 앨범을 발매한 그룹이 몇 있으며 2018년 하반기부터는 대부분의 아이돌 그룹 앨범이 키트 형태로도 발매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굉장히 놀랐다. 키노 앨범은 판매 시 앨범 판매량으로도 집계가 되며 앨범 포토카드도 제공되는 등 일반 앨범과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
©위드드라마
키트 앨범과 비디오는 사용법이 간단하다. 전자기기에 키트 플레이어 어플리케이션을 설치한 뒤, 버튼이나 단자를 인식시키면 어플리케이션에서 커넥팅 작업이 이루어지고, 키트 속 컨텐츠를 다운로드 받아 기기를 통해 언제든 컨텐츠를 감상할 수 있다. 키트 앨범과 비디오는 CD보다 작아 부피를 덜 차지할 뿐만 아니라, CD를 넣을 수 있는 데스크탑이나 전용 플레이어보다는 노트북이나 스마트폰, 태블릿 등 CD롬이 없는 최신 전자기기에 더 익숙한 요즘 세대들이 사용하기에 적합하다. 아직 아이돌 앨범이 CD로만 발매되는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혹시 요즘 아이돌 앨범을 어떻게 듣는지 묻는다면 이런 새로운 기술을 자랑할 수 있다.
2. 소통 채널
아이돌 소통 채널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V LIVE’는 2015년에 시작해 2.5세대 팬들도 자주 접해본 채널이다. 소통 채널의 역사에서 더 전으로 올라가면 2세대 아이돌이 즐겨 쓰던 UFO타운이 있었다. 아이돌과 1대1로 문자를 주고받을 수 있었던 UFO타운은 2018년 2월에 서비스가 종료되어 2.5세대 이전 팬들의 추억 속으로 남겨졌다. 2세대라니, 10년도 더 전이니 너무 옛날인가 싶지만 필자가 좋아하는 2.5세대 아이돌은 잠깐동안 UFO타운을 사용했었다. 이 외에도 2.5세대 아이돌 팬들은 공식 팬카페나 개인이 운영하는 팬페이지에서 활발히 덕질하며 아이돌, 팬들과 소통했다.
하지만 2.5세대에게 버블, 유니버스, 위버스 등은 익숙하지 않다. UFO타운이 2018년 초 서비스를 종료한 후, 최근 3년간 덕질 소통 플랫폼은 정교한 기술적 변화를 거쳤다. 그 결과 이제 아이돌 팬들은 버블, 유니버스, 위버스 등 케이팝 플랫폼과 SNS나 유튜브로 아이돌과 더욱 활발하게 소통한다.
유니버스 시작 페이지
최근에 활동하는 아이돌은 버블이나 유니버스, 위버스 중 적어도 하나는 사용하고 있다. 이 플랫폼들은 UFO타운이나 공식 팬카페, 팬페이지 등 예전의 소통 채널에 비해 다양한 기능을 포함하고 있다. 필자가 사용하는 유니버스를 예를 들어 설명하면, 아티스트를 구독하면 멤버십에 따라 유니버스에서만 제공되는 사진, 예능, 뮤직비디오 등의 컨텐츠를 감상할 수 있고, SNS처럼 아이돌이 작성하는 피드와 프라이빗 메시지, 프라이빗 콜 등의 기능으로 직접 소통할 수도 있다. 케이팝 아이돌과 팬들 전용 어플리케이션이 생기면서 한 플랫폼에서 이렇게 다양한 컨텐츠를 누릴 수 있다.
3. 개인 팬
최근 케이팝 트렌드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프로듀스101’ 시리즈로 3세대 말부터는 ‘개인 팬’에 대한 인식이 점차 바뀌었다. 개인에게 투표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들의 관심이 아이돌 ‘그룹’에서 ‘멤버’로 옮겨갔고 관심 분야에만 집중하는 트렌드를 반영한 유튜브나 넷플릭스 등 맞춤 컨텐츠를 볼 수 있는 플랫폼이 발달하며 아이돌 ‘그룹’을 보는 시선 또한 달라졌다. 또한 전체적으로 아이돌 그룹의 멤버수가 많아지며 한 영상이나 컨텐츠 내에서 멤버 전체를 담기가 어려워지자 개인 직캠이나 멤버 개인 컨텐츠가 발달한 점도 개인 팬이 자연스러워진 분위기에 한 몫 했다.
2.5세대 아이돌을 한창 좋아하던 때는 아이돌 그룹의 특정 멤버만을 좋아하는 개인 팬을 ‘악성 개인 팬’이라며 팬덤 내에서 배척하는 분위기였고, 그룹의 모든 멤버를 좋아하는 ‘올팬’이 많은 것을 팬덤의 장점으로 여기기도 했으나 최근 아이돌 팬들은 그렇지 않다. 여전히 개인 팬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타 멤버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특정 멤버만을 응원하는 것이 전에 비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그룹이 늘어났다. 굿즈도 멤버별로 나오고 멤버들의 개인활동이 활발해지며 2.5세대에 비해 개인 팬의 덕질이 훨씬 수월해졌다.
4. 온라인 덕질
2.5세대 아이돌 팬들에게 오프라인 콘서트는 1년에 한 번 있는 큰 행사였다. 콘서트는 티켓팅부터 공연이 끝난 후 며칠까지도 열기로 가득한 과정이었다. 콘서트 외에도 팬미팅, 팬사인회, 공개방송, 각종 오프라인 행사 등 2.5세대 덕질의 대부분은 오프라인으로 이루어졌다. 오프라인 행사를 가지 못하고 SNS로 올라오는 행사 사진들과 후기를 보면서 방구석에서 간접적으로 덕질하는 사람들을 ‘안방수니’라고 부르기도 했다.
출처 - 뮤직플랜트
온라인 덕질은 코로나19의 장기화로 2020년부터 케이팝 덕질의 중심이 되었다. 이제 각종 오프라인 행사들은 온라인으로 대체되거나 생중계된다. 온라인 콘서트와 영상통화 팬사인회, 자체 제작 콘텐츠들이 대표적인 온라인 덕질의 요소이다. 2020년부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아이돌은 이러한 온라인 콘텐츠와 온라인 활동에 익숙할 것이다.
출처 - 데이식스(DAY6) 공식 트위터
2.5세대 덕후의 입장에서 온라인 콘서트는 과연 덕질의 ‘끝판 왕’인 콘서트를 충분히 즐길 수 있을지 약간의 의심이 들었다. 심장까지 쿵쿵 뛰는 라이브 음악과 폭죽 소리를 느낄 수 있는 오프라인 콘서트가 진짜 덕질 아닌가라는 생각은 온라인 콘서트를 보기 직전까지 지속됐다. 하지만 막상 온라인으로 덕질을 해보니 카메라와 영상 기술을 이용한 독특한 연출 등 오프라인과는 다른 재미가 있었다. 이제 ‘안방수니’라는 말도 거의 사라졌고, 오히려 편리함 때문에 온라인 덕질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또한 외국인 케이팝팬이 급증하며 온라인으로 케이팝을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이 전세계적으로 많아진 점도 온라인 덕질의 장점이다.
이상으로 필자가 10년 이상 아이돌을 덕질하면서 체감한 덕질의 변화를 몇 가지 짚어보았다.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새롭게 케이팝 아이돌에 입덕한 팬들은 이전 세대 팬들의 덕질 방법이 궁금했을 것이다. 글을 쓰고 나니 스스로가 옛날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전 세대로 추억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사실 아이돌 2.5세대와 3세대가 그렇게 옛날은 아니다. 글에서 말하고 있는 2.5세대와 3세대 언저리가 2010년대 초중〮반이니 아직 10년도 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로 흘러간 시간에 비해 케이팝 판이 굉장히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아직 어린 팬들과 큰 세대 차이를 느낄 정도로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아이돌을 계속 좋아한다는 것은 최신 기술이나 트렌드를 따라갈 수 있는 감각을 놓치지 않게 한다. 아이돌 팬덤 문화 변화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으로서 앞으로 더 많은 세대를 거치며 어떤 변화가 생길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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