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어떤 것이 생각나는가? 아마 대부분 ‘고리타분함’, ‘어려움’ 등 부정적인 단어들이 떠오를 것이다. 이는 18세기 후반까지 클래식이 주로 왕족, 귀족 등 부르주아 계층이 즐기던 음악이었음에 기반한 정서가 아닐까 하고 추측한다. 그러나 오늘날 클래식은 더 이상 부르주아 계층만이 즐기는 음악이 아니다. 스트리밍 앱, 미디어 플랫폼의 발달로 언제 어디서든 클래식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고, 클래식을 현대적 요소와 조합하는, 이른바 퓨전 형식을 차용한 음악이 시장에 다수 유통되며 클래식 청취자의 폭은 점차 넓어지고 있다.
클래식을 활용한 퓨전 음악은 해외 팝송, 영화 OST에 한정되지 않는다. 최근 클래식을 샘플링한 케이팝이 차트 상위권에 오르는 일이 다수 발생하며 케이팝 업계에서도 클래식을 샘플링하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클래식 음악을 샘플링한 케이팝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① BLACKPINK – Shut Down
샘플링 곡: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2번 B단조 - 3악장. 라 캄파넬라 (Paganini: Violin Concerto No.2 In B Minor Op.7 - III. La Campanella)
음의 스케일이 크고 테크닉이 화려하기로 유명한 니콜라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 연주하기 까다롭다고 평가되는 이 곡을 케이팝에 접목시키기엔 분명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정관념은 블랙핑크의 <Shut Down>이 발매되며 부서졌다. ‘블랙핑크’가 그룹이 가진 파워풀하고 화려한 이미지를 <라 캄파넬라>의 날카롭고 강렬한 선율을 통해 더욱 부각시킨 것이다.
러닝 타임 내내 바탕으로 깔린 <라 캄파넬라>는 블랙핑크가 이번 곡을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 ‘태생부터 다름’, ‘잘난 나’를 짧은 시간 내에 효과적으로 전달해준다. 주로 우울한 느낌이 강한 ‘단조’가 사용된 음악 <라 캄파넬라>가 샘플링되면서 자신감을 표현하는 곡으로 재탄생하다니, 블랙핑크의 음악성의 한계는 어디까지일지 궁금해진다.
② Red Velvet (레드벨벳) – Feel My Rhythm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배운 사람이라면 한 번쯤 연주해보았을 바흐의 <지선상의 아리아>. 본래 <관현악 모음곡 3번 라장조 아리아>라는 이름의 춤곡이었으나 19세기 후반 바이올리니스트 아우구스트 빌헬미에 의해 편곡되며 서정적인 면모가 부각되었고, <G선상의 아리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차분하고 음 하나하나를 정확히 짚어내는 것이 특징인 이 곡은 레드벨벳을 만나며 경쾌하면서도 절제된 분위기의 축제를 나타내는 곡으로 재탄생했다.
<Feel My Rhythm>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롤러코스터’다. 처음엔 롤러코스터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처럼 잔잔히 <G선상의 아리아>가 연주된다. 그러다 오르막길을 오를 때의 진동을 표현하듯 강렬한 비트가 깔리며 음악이 전개된다. 그 후 첫 내리막을 달리기 전 평온한 구간에 도착한 것과 같이 차분히 <G선상의 아리아>가 깔리며 프리 코러스가 진행된다. 그리고 드디어 첫 내리막을 달리듯 경쾌하게 코러스가 전개된다.
SM 특유의 서늘한 고급스러움을 담아내면서 원곡만의 분위기 또한 잃어버리지 않는, 이러한 참신한 편곡이 이 곡을 반복해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이유 아닐까.
③ 더보이즈 (THE BOYZ) – 도원경 (Quasi una fantasia)
샘플링 곡: 베토벤: 월광 소나타 1악장 (Beethoven: Sonata No. 14 'Moonlight' Op. 27 1st Movt)
2020년과 2021년에 걸쳐 엠넷에서 방영된 서바이벌 프로그램 로드투킹덤과 킹덤. 다수의 남자아이돌 그룹이 출연하며 아이돌 팬 사이에서 많은 화제를 모았다. 이를 관심 있게 본 시청자들이라면 프로그램 내 등장하는 경연곡들을 한 번씩은 들어봤을 것이다. 그런데 그중에도 클래식을 샘플링한 곡들이 꽤나 있다는 것을 아는가? 그 중 하나인 더보이즈의 <도원경 (Quasi una fantasia)>을 소개하고자 한다.
<도원경>은 본래 동양적인 색채가 짙은 곡이다. 곡의 가사부터 멜로디, 무대까지 모두 ‘동양 판타지’라는 앨범 콘셉트에 충실하다. 이러한 곡이 과연 서양의 클래식과 잘 어울릴까 싶겠지만, 더보이즈의 <도원경 (Quasi una fantasia)> 무대를 한 번만이라도 감상해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동양풍 음악과 서양풍 음악의 조화는 참신함을 넘어 굉장히 잘 어울리기까지 한다.
더보이즈의 무대를 설명하자면, 처음엔 원곡의 분위기를 따라가는 것처럼 차분하면서도 몽환적인 장면이 이어진다. 그러다 중간에 <월광 소나타>가 연주되며 곡의 분위기가 반전된다. 이에 더보이즈의 군무가 더해지며 곡의 강렬함은 배로 증폭된다. ‘동양 판타지’라는 원곡의 색채를 잃지 않으면서도 <월광 소나타>라는 파워풀한 곡을 사용해 그룹의 정체성을 드러낸 더보이즈의 무대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만하다.
앞서 설명한 더보이즈뿐만 아니라 골든차일드도 로드투킹덤에서 <WANNABE>에 파가니니의 카프리스(Paganini 24 Caprices No.24 In A Minor Op.1)를, 에이티즈도 킹덤에서 <Wonderland>에 베토벤 교향곡 9번(Beethoven: Symphony No.9)을 샘플링해 이색적인 무대를 만들어냈다. 클래식 샘플링 활용법이 각각 달라 각 무대 별로 색다름을 느낄 수 있으니 한 번씩 들어보길 추천한다.
④ 신화 – T.O.P (Twinkling Of Paradise)
샘플링 곡: 차이코프스키: 백조의 호수 (Tchaikovsky: Swan Lake)
사실 클래식 음악이 샘플링되기 시작한 것은 3, 4세대 아이돌부터가 아니다. 클래식 샘플링은 1세대 아이돌 노래 중에서도 간간이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곡으로는 신화의 <T.O.P (Twinkling Of Paradise)>가 있다.
<T.O.P (Twinkling Of Paradise)>에선 곡의 전반에 걸쳐 <백조의 호수>의 선율이 등장한다. 심지어 코러스에선 가사 전체에 <백조의 호수> 멜로디를 적용했다. <백조의 호수> 특유의 슬프면서도 감미로운 멜로디는 곡의 주제인 ‘떠나간 연인을 향한 그리움’을 표현한 데 있어 굉장히 효과적인 장치로 작용한다.
이 곡의 분위기는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절제된 파워풀함’이 아닐까. 90년대 특유의 묵직한 비트에 클래식을 섞은 너무 과격하지도, 감성적이지도 않은 이 곡은 그야말로 ‘지금 들어도 세련된’ 곡이다.
이렇듯 케이팝 아이돌들의 클래식 샘플링 시도는 시대를 막론하고 계속해 이어져 왔다. 앞으로도 케이팝 아이돌들이 클래식을 케이팝에 녹여내는 시도를 하여 클래식이 지루하다는, 어렵다는 편견을 깰 수 있었으면 한다. 또한 이러한 퓨전 음악이 클래식 애호가들은 케이팝을, 케이팝 애호가들은 클래식을 감상하게 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클래식 샘플링의 다음 주자는 과연 누구일지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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