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애니메이션에 빠져 살던 적이 있다. 그것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 중 하나인 고3 수험생 시절에 말이다. 여름 즈음이었는데, 유튜브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이누야샤’ 명장면을 모은 재생목록을 발견했었다. 하필이면 첫 영상이 전설 아닌 레전드로 손꼽히는 금강의 죽음이었고, 그 길로 필자는 초등학교 때도 안 보던 ‘이누야샤’ 정주행을 했다. 야자 끝나고 와서 한 편씩 봤지만 워낙 양이 많았기에 반쯤 보다 그만뒀고, 나머지는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편한 마음으로 봤다.
그 영상을 본 날도 그랬다. 비가 오던 늦여름이었는데, 당시 새로운 대외활동을 시작했던 필자는 첫 콘텐츠 제작을 위해 아이템을 고심하고 있었다. 그날도 열심히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면서 ‘최신 유행’에 대해 공부하던 중에, 우연히 한 게시글을 보게 되었다. 제목은 ‘오마이걸 다섯 번째 계절 이누야샤 오프닝스럽다.’ 직관적인 제목에 홀린 듯이 마우스 포인터를 가져다 댈 수밖에 없었고, 1분 36초가량의 영상을 보고 나서 고3의 추억과 그 너머의 과거에 존재하는 여름의 추억들이 막을 새도 없이 밀려왔다. 짜릿했던 여름, 달콤했던 여름, 그리고 아련한 여름들의 화살들이 나를 과녁삼아 촘촘하게 박혔다. 둥둥둥, 거리는 리듬에 맞춰 1초에 하나씩, 쾅쾅.
© WM ENTERTAINMENT
‘다섯 번째 계절’을 비롯한 오마이걸의 정규 1집은 물을 가득 머금은 수채화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이 수채화의 느낌은 ‘소나기’, ‘심해 (마음이라는 바다)’처럼 투명하면서도 파란 물을 연상케 하는 곡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타이틀곡에서 왠지 모를 ‘비’가 떠올랐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눈을 감고 노래를 들으며 장면을 상상하면, 분명 파란 잎들 사이로 고개를 내민 벚꽃나무 아래서 바람에 흩어지는 꽃잎을 맞으며 ‘그 사람’을 기다리는 화자가 떠오른다. 하지만 감긴 눈이 만들어낸 암막을 배경 삼아 이미지로 그려보면 직전에 비가 와서 그 물을 가득 머금은 꽃들이 떨어지며 물방울도 바람결을 따라 날리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상상됐다. 아지랑이처럼 어지럽게, 알아차릴 새도 없이.
볕이 잘 드는 창가 옆에 앉아 주구장창 들었던 노래인데 뜬금없이 물이라니. 참신하다는 생각 이전에 왜 그런 이미지여야만 하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다. 멜로디가 소위 ‘아련함이 터진다’고 말하곤 하는 곡조라서? 그런 곡조의 노래들을 많이 들었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비밀정원’과 비슷한 분위기라서? 그 노래의 연장선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확실히 결이 다르다. 그렇다면 하나밖에 없다. 물이 필수불가결한 식물을 반복적으로 묘사하는 가사 때문이었다.
- 사랑이 피워낸 ‘너’라는 꽃
‘다섯 번째 계절’의 가사를 읽어보면 유독 자연현상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가사의 첫 부분을 읽어보자.
(너인 듯 해) 내 맘에 새하얀 꽃잎을 마구 흩날리는 건
(너인 듯 해) 발끝에 소복하게 쌓여가 또 쌓여가
화자가 사랑하는 대상인 ‘너’는 화자의 마음에 새하얀 꽃잎을 끝없이 쌓는다.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은 사랑을 ‘순수한 감정의 결정체’로 말하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이 가지는 수많은 감정 중에서 사랑만큼 타인에게 무조건적으로 퍼주는 것이 없다. 사랑에 빠질 때 심장에서 벌어지는 화학작용, 그 하나만 믿고 자신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 ‘사랑’을 상대방에게 알려주려 한다. 그렇게 맑고 순수한 감정은 작은 충격에도 쉽게 깨지지만, 그 파편들도 결국 사랑을 담고 있어 그 속에서는 사랑으로 만들어진 여러 감정들이 돋아나곤 한다. 때로는 두근거림, 때로는 아릿함, 때로는 벅차오름. 이 조각들을 꽃잎으로 비유한 것은 원초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날카로우면서도 말랑한 무형의 존재를 형상화하기에 꽃잎만큼 적합한 비유가 없기 때문이다.
- 사랑이라는 물을 먹고 자라는 나무
(그리고 넌) 작은 싹을 틔워 금세 자라난 아름드리
짙은 초록의 색깔로 넌 내 하늘을 채우고
꽃이 피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나무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가사를 읽어보면 꽃잎이 날린 후에 아름드리가 ‘금세 자라난’ 모양새를 보인다. 이는 두 가지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하나는 화자의 마음에 돋아났던 옛사랑을 잊고 ‘너’를 향한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랑은 일생에 한 번 오는 것이 아니기에 ‘너’ 이전의 사랑도 분명히 존재한다. 과거의 사랑 역시 화자의 마음에 돋아나 뿌리를 내리고 잎으로 하늘을 채웠을 것이다. 그리고 종국엔 꽃을 피워내 화자를 환하게 밝혔을 것이다. 하지만 영원의 약속은 얼마든지 깨질 수 있고, 그 후에 새로운 사랑 역시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때 ‘너’는 나무로 자라나 화자가 가진 옛사랑의 흔적인 꽃잎을 모두 털어내고, ‘새하얀 꽃잎이 흩날리는’ 현상을 통해 미련을 털고 새로운 두근거림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나머지 하나는 꽃을 심장 박동에 맞춰 피어나는 두근거림으로 치환하는 것인데, 사랑을 자각하기 전 인간의 신체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타난다. 그 사람을 보기 민망해 괜히 시선을 피하거나 땀이 가득 찬 손을 쥐었다 피는 등 평소에는 하지 않았던 행동 때문에 놀라곤 한다. 이들의 근원은 아무래도 인간이 신체의 변화를 감지하기에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심장 박동의 변화라 할 수 있겠다. 점점 빨라지는 박동에 맞춰 두근거림이 꽃처럼 팡팡, 개화한다면, 그 후에 등장하는 아름드리는 화자의 마음속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사랑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나무에 피어날 꽃들도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두 해석을 조합하는 것 또한 유의미하다 생각한다.
나무는 잘 자라기 위해서도, 꽃을 피우기 위해서도 물이 필요하다. 화자의 마음속에 자라난 나무는 사랑이라는 물로 자랐고, 꽃도 그 물을 머금고 있다. 위에서 말한 ‘물을 머금은 꽃잎이 날리는’ 이미지는 여기서 비롯되었다 생각한다. 결국 모든 이미지는 사랑이 만들어낸 마음의 다양한 상들을 나타낸 것이라 말할 수 있다.
- 새로운 시선은 언제나 짜릿하다
필자가 이 노래를 들으면서 ‘내 가슴을 치고 갔다’고 느꼈던 가사는 다음과 같다.
lalalalalalala 네가 내게 피어나
아지랑이처럼 어지럽게
lalalalalalala 네가 내게 밀려와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꾸는 꿈
후렴구로 반복되는 이 가사는 ‘다섯 번째 계절’ 속 화자가 사랑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먼저 앞의 두 구절은 위에서 살펴보면 ‘꽃’에 비유되는 사랑이라 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듯하면서도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너’는 사랑으로 인해 감정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서게 된 화자의 상황과 일맥상통한다.
주목하고 싶은 건 마지막 구절인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꾸는 꿈’이다. 실제로 노래가 나왔을 당시에 이 부분이 좋아서 반복 재생을 하기도 하고, 혼자 있을 때마다 소리 내어 읽어보기도 할 정도로 좋아하는 부분이다. 눈을 떠야만 꿀 수 있는 꿈이라니.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눈을 가리고 있기에 사랑을 계속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사랑이란 ‘꿈’을 꾸고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만들어진 눈을 떠야만 한다. 이는 사랑을 한다는 것이 곧 현실에서 ‘너’와 같은 마음을 공유한다는 뜻이고 이 사랑을 이어 가기 위해 서로를 바라봐야 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혹은 더 이상 사랑이 나 혼자만의 상상 속의 것이 아니기에 눈을 뜨고 꿈을 꾸는, 현실과 비현실의 양가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사랑을 뜻한다고도 볼 수 있다. 둘이 아니어도 되지만 둘이어야만 하는 사랑, 꿈만 꿔도 되지만 현실에서 이뤄지는 사랑. 눈, 꿈, 사랑.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이 감정을 참신하게 풀어낸 가사라고 생각한다.
이 노래의 마지막 가사는 ‘love for real’이다. 진실, 혹은 현실을 위한 사랑을 쟁취한 화자는 마음의 나무를 어떻게 가꿔나갈까. 늘상 경험하는 사계절 너머의 새로운 계절은 이 나무를 어떻게 보살펴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사랑이 지속되는 한 꽃이 피어나는 일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날마다 새하얀 꽃잎으로 새로운 사랑을 펼치고, 그 위에 여러 색을 입혀 알록달록한 불빛들로 가득 찰 화자의 사랑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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