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M 엔터테인먼트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언제나 시간이 필요하다. 처음 K-POP에 세계관이 등장했을 때, 대중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조합에 대해 혼란스러움을 느꼈고 혹자는 거부감을 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K-POP 씬에서 세계관은 자연스러운 개념으로 자리 잡았으며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음악에 고유한 세계관을 접목해 이를 표현해내고 있다.
특히, SM 엔터테인먼트는 K-POP에 세계관을 도입한 선두주자로서 계속해서 실험적인 시스템에 도전해왔다. 이제 SM은 EXO의 초능력, NCT 무한확장체제를 넘어 SMCU(SM CULTURE UNIVERSE)를 새로운 비전으로 삼아 소속 그룹의 세계관과 스토리를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으로 연결하고자 한다.
에스파는 SMCU라는 새로운 서막을 여는 첫 번째 주자가 되었고, 아바타를 전면에 내세운 독보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우리 앞에 등장했다. 실존하는 멤버들 외에 아바타 멤버인 ae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놀라운 시도였고, 아바타 멤버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관한 관심과 우려가 곳곳에서 쏟아져 나왔다. 에스파는 이러한 사람들의 혼란스러움을 뒤로하고, 한층 또렷해진 세계관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글자 그대로 한 단계 더 앞으로 나아간 에스파의 신곡 ‘Next Level’을 통해서.
아바타의 존재를 설득시키는 세계관의 힘
aespa 에스파 'ep1. Black Mamba' - SM Culture Universe
‘Next Level’을 공개하기 이틀 전, SM 엔터테인먼트는 세계관의 스토리를 담은 시네마틱 영상인 ‘ep1. Black Mamba’를 선공개했다. 데뷔곡 ‘Black Mamba’를 통해 대중에게 세계관의 핵심 용어인 ae와 Black Mamba를 강렬하게 각인시키긴 했지만, 주어진 정보의 양이 적어 그동안 내용을 해석하거나 상상할 여지가 부족했다. 해당 영상은 세계관의 개념을 구체화하고 스토리를 시각화 시켜 보여줌으로써 궁금증을 해소하고 세계관으로의 몰입을 가속화한다.
영상 속 세계는 P.O.S를 통해 아바타 ae들이 살고 있는 FLAT과 현실 세계가 이어져 있는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 인간은 아바타와의 싱크(SYNK)를 통해 ae와 게임을 하기도 하고, 대화를 나누기도 하며 활발히 교류한다. 그러던 중, 위협적인 존재인 Black Mamba로 인해 ae가 해킹되어 동시다발적인 SYNK OUT 현상이 발생한다. 에스파 멤버들은 안내자인 나비스(naevis)의 도움으로 자신의 ae를 구하기 위해 FLAT 너머 아무것도 규정되지 않은 무규칙, 무정형, 무한의 영역인 광야(KWANGYA)로 향한다. 이처럼 1화의 이야기는 앞으로 에스파가 블랙맘바와 ae를 찾으러 떠나는 여정에 타당성을 부여한다. 거대한 이야기의 시작이다. 전체적인 형식은 숏폼 드라마를 표방하지만, 영상 중간중간 애니메이션이 나는 부분에서 만화적인 요소를 극대화하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들이 연상되기도 한다.
세계관 영상에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아바타의 존재를 대중에게 설득시키는 방식이다. 에스파 세계관에서 ae, 즉 아바타는 개인이 사이버상에 올린 정보를 바탕으로 인격이 부여된다. 사이버 상에 자신의 소식을 업로드 할 때, 실제보다 못 나온 사진을 올리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수정 및 가공을 통해 행복하게 사는 모습, 실제보다 잘 나온 완벽한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그것이 현실과 조금 다를지라도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ae는 우리가 만들어낸 욕망을 토대로 재구성된 또 다른 ‘나’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를 사용할 때 드러나는 인간의 욕망을 ae에 녹여냄으로써 실제 사회현상을 비틀어 꼬집고, ae를 단순한 아바타에서 그치지 않도록 만든다.
영상의 도입부, 에스파의 로고 뒤로 가장 처음 등장하는 것은 한 영어 문장이다. ‘Where did we come from?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이 근원적인 질문에 대해 SM 엔터테인먼트는 영상 속에서 일종의 답을 내린다. ‘l'existence précède l’essence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이는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문장을 인용한 것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사물은 본질이 먼저 정해지고 본질에 충실한 실존(존재)이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의자라는 사물은 사람이 앉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존재하게 된다는 점에서 본질이 실존(존재)에 앞선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인간만은 실존(존재)이 본질에 앞선다고 보았다. 인간은 그저 세상에 존재할 뿐, 개별적인 인간을 규정할 본질, 즉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인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자유롭게 규정하고 발전해 나갈 수 있다. 뒤틀린 인간의 심리를 꼬집으면서도, 인간의 존재 자체를 긍정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다.
거대한 서사를 견고하게 만드는 음악
aespa 에스파 'Next Level' MV
ⓒ 문화일보
거대한 서사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음악의 힘은 SM의 전속 프로듀서인 유영진으로부터 나온다. 에스파의 신곡인 ‘Next Level’은 영화 '분노의 질주:홉스&쇼’의 OST를 리메이크한 곡임에도 불구하고, ‘SMP(SM Music Performance)’의 향기가 물씬 묻어나는 곡이다. 특히 한 곡에 여러 장르가 포함된 듯한 곡 흐름에서 유영진의 전작들을 연상할 수 있다.나비스를 콜링하며 반전되는 곡의 분위기와 닝닝과 윈터의 파워풀한 보컬, 긁는 듯한 고음, 특유의 창법은 SMP에 갈증을 느꼈던 K-POP 팬들의 귀를 번쩍 뜨이게 만든다. 또한 보컬 이후 이어지는 카리나와 지젤의 랩 파트 또한 조화롭게 어우러지면서 쾌감을 선사한다. 유영진 프로듀서 특유의 사회 비판적이고 반항적인 가사는 세계관을 설득해야 하는 에스파 곡의 특성에서도 살아남아 그 색채를 느낄 수 있다.
유영진 프로듀서는 ‘Black Mamba’와 ‘Next Level’를 연달아 프로듀싱하며 작사 또한 전담했다. 가사의 은유로 서사를 담아내야 하는 어려운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계관을 압축하여 가사로 온전히 전달해냈다. 세계관 영상을 보면, 그의 가사가 얼마나 세계관에 충실했는지 다시금 느낄 수 있다. 블랙맘바를 찾아 광야를 떠돌던 에스파가 저 너머의 문을 열어 Next Level인 KOSMO에 닿을 때까지, 유영진 프로듀서가 그 여정을 에스파와 함께 한다면 음악적인 측면에서는 걱정이 없지 않을까 싶다.
ⓒ SM 엔터테인먼트
미지수였던 아바타 세계관은‘Next Level’로 한 겹 그 베일을 벗었다. SM 엔터테인먼트는 제작자와 대중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탄탄한 세계관을 구축하는데 굉장한 공을 들이고 있는 모습이다. 그동안 K-POP씬에서 이렇게까지 세계관에 주력한 그룹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에스파는 전무후무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Black Mamba’에서 아바타 세계관을 처음 접했을 때보다, ‘Next Level’에서 대중들은 한층 유연하게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 이 세계관이 대중에게 자연스러운 개념으로 자리 잡을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K-POP 팬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세계관이라는 신문물에 열광하고 있는 지금, K-POP은 새로운 개화기에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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