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지금을 낭만이 소멸된 시대라고 말한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살아가기보다는 한 개인으로서 살아남기에 바쁜 사람들. 상호 간의 이익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더 중요시하는 분위기. 치열한 경쟁과 과도한 스트레스가 나날이 증폭되는 사회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나 하나 먹고살기 힘든 환경에서 남까지 챙길 여유가 없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구석구석 드러날 뿐만 아니라 공공연하게 전시되는 미디어에서도 나타난다. 유튜브 동영상부터 공중파 방송까지, 공동체로서의 훈훈한 모습이 연출되기보다는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꼼수를 부리거나 상대를 속이는 모습을 더 많이 찾아볼 수 있게 됐다. 미디어에서 이러한 모습을 다루는 빈도가 과거에 비해 대폭 증가하면서 미디어 시청에 대한 피로도가 늘어났다. 그러한 모습을 화면 너머로도 봐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런 콘텐츠가 많이 소비된다는 사실이 피곤해진 거다. 화면 너머의 세상만큼은 평화로운 모습이 가득하길 바랐다. 이러한 점이 <유퀴즈>, <알쓸인잡> 등 잔잔하면서도 다정한 토크쇼가 현재 인기를 끌고 있는 주된 원인이지 않을까 싶었다.
이러한 심리가 작용한 것인지 아이돌들이 어떠한 방송, 또는 자체 콘텐츠에 출연해 인류애를 가득 담은 발언을 하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승점을 얻기 위해 경쟁을 펼치는 모습보다는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 보고, 또 인간으로서의 마음과 행동을 다시 재고해 보게끔 하는 발언들은 내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태도를 사소하게나마 바꾸기도 했다. 그만큼 말과 생각의 힘은 생각보다 위대하다. 그렇기에 이번 글에선 인상 깊었던 아이돌들의 발언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세븐틴 공식 유튜브
지난달 말 공개된 세븐틴(SEVENTEEN) 자체 콘텐츠 <[GOING SEVENTEEN] EP.101 13인의 성난 사람들>에선 ‘피노키오를 죽이면 살인인가, 기물 파손인가’라는 주제가 논의되었다. 어떻게 보면 간단한 문제였다. 피노키오를 하나의 생명체로 간주하면 살인, 그저 목각 인형에 그치는 존재로 간주하면 기물 파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세븐틴 멤버들의 생각은 단순한 수준에서 멈추지 않았다. ‘낭만’을 언급하며 인류애적 측면에서 상황을 바라보는가 하면 더 나아가 사회적 문제, 법에 걸쳐 폭넓은 토론을 이어나갔기 때문이다.
이중 총 세 명의 멤버가 표명한 입장이 내게 있어선 가장 기억에 남는다. 먼저 우지는 “인간이라는 카테고리를 어디까지 우리가 포용하고 정의를 할 수 있을까? 삶에는 낭만이 존재한다. 생물학적 특징만 최우선으로 해서 인간을 규정할 수 있는가? 인지 능력, 자의식, 도덕적 판단력, 감정 표현 등 모든 게 인간에 가까운데… ‘인간다움’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어떠한 형체, 영혼을 단순 인형이라고 기물 파손이라 하는 것은 인간다움의 높은 가치를 그저 기물로만 판단하는 낭만 없는 행동이다. 따라서 피노키오는 살인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디에잇은 “법은 원래는 없는 것. 인간이 살아가다 보니 많은 경험과 사례가 생겨 법이 만들어진 것이다. 모든 인간 옆에 피노키오 같은 존재가 있다면 인간은 피노키오를 위해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하며 피노키오는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입장을 펼쳤다.
디에잇의 입장에 덧붙여 버논은 “우리 모두 피노키오가 엄연한 인격체를 지닌 존재라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면 나는 피노키오를 나와 동등한 존재로 본다. 그런데 피노키오를 지킬 수 있는 법이 고작 기물 파손밖에 없다는 것은 부당하다. 법은 부당하면 때에 따라 개정된다. 법은 그 자체로 우리를 지키고 질서를 지키기 위해 있는데, 피노키오는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법이 기물 파손죄밖에 없다. 이는 안타까움에서 끝나면 안 된다. 역사를 보면 부당한 법들은 계속 개정이 되어 왔다”라며 안타까운 마음만으로 이러한 상황을 바라볼 것이 아닌, 피노키오와 같이 인격체를 지닌 존재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역사적으로 늘 그래왔듯 법을 개정하고, 그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맞다는 입장을 밝혔다.
피노키오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며 말하기 때문에 이를 인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그런 단순한 주장에서 더 나아가 세븐틴 멤버들은 인류애를 가득 담은 토론을 펼쳤다. 앞서 언급된 말처럼 그저 단순히 인형이라고 해서 이가 지니고 있는 어떠한 인격체 등을 무시하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행위다. 피노키오라는 동화 속 주인공을 통해 함께 살아가는 데 있어 어떠한 태도로 그를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 깊숙한 토론을 나누고, 또 이를 통해 시청자들이 깊은 생각을 해보게끔 해준 세븐틴 멤버들에게 감사함을 표한다.
/=디글 유튜브
2022년 말부터 2023년 초까지 tvN에서 방영된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인간 잡학사전(이하 ‘알쓸인잡’>이란 프로그램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한 번쯤 깊게 고민해 보거나 생각해 보면 좋은 주제들을 매주 다뤘다. 이 프로그램에는 장항준 감독, 김영하 작가, 김상욱 물리학과 교수, 이호 법의학자, 심채경 박사 등 각 분야에서 뛰어난 역량을 가진 이들이 출연했다. 여기에 방탄소년단 알엠(RM)이 출연하며 화제를 모았다.
알엠은 평소 책을 많이 읽거나 시사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이는 등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나 직접적으로나 표출해왔다. 그는 이전에 한 인터뷰에서 ‘음악은 특정 기분에 빠뜨리는 주파수의 축적이기에 장르는 의미가 없다’고 발언하며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자체 콘텐츠 또는 기타 방송에서 은연중에 다독가의 기질을 내비치는 등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왔다. 그런 그가 <알쓸인잡>과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전혀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다.
한 에피소드에서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을 다뤘다. 알엠은 이에 대해 “저는 에미넴, 타블로 등을 보면서 자랐는데, 아무리 해도 그 사람들보다 제가 기술적으로 랩을 더 잘할 것 같지는 않았다. 가사도 그 사람들보다 더 깊이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방탄소년단이라는 팀을 통해서 영향력을 얻기는 했지만, 굳이 내가 솔로 앨범을 내야 할까 싶었다. 그런데 내가 굳이 사람들에게 이를 보여주고 용감하게 프로로서 평가받으려고 하는 이 마음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이는 결국 내게 잘하는 다른 가수들과는 다른 나만의 모서리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내 주파수가 분명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래서 내 마음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답하며 시청자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했다. 본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다져지지 않으면 그 마음은 타인에 대한 질투, 더 나아가서는 분노와 적대심까지 번지게 된다. 알엠의 이러한 발언은 좁은 의미로 생각했을 땐 나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이지만, 넓게 생각해 보면 나를 둘러싼 이 사회와 더 나아가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또한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 있어서는 매우 필요하는 마음가짐이자 생각이기에 인상 깊었다.
또 다른 에피소드에서도 비슷하게 ‘나를 사랑하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해 토론을 나누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알엠은 “가치판단의 무게중심이 본인 안에 있기가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 알고리즘은 나에 대한 데이터를 분석해서 추천을 해준다. 그게 내가 좋아하는 내 색이라고 받아들이면서 남들과 비슷한 취향을 갖게 된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굉장히 유니크한 무언가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며 의구심을 표출했다. 이에 대해 심채경 천문학자가 “나의 경계를 조금 희미하게 두는 것도 괜찮다. 내가 나라는 존재를 너무 촘촘하게 가둬놓으면 너무 쉽게 무게중심이 흔들릴 수 있다.”라고 답했다. 이 또한 앞서 언급한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과 비슷하게, 좁게는 나, 넓게는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볼 수 있겠다. 내 안에 무게중심이라는 것이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는 알엠의 모습과 이에 적절한 대답을 해준 심채경 천문학자의 모습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어떠한 태도를 가지면 좋을지에 대한 답을 간접적으로 전달해 주었다.
앞서 언급한 콘텐츠들을 한 마디로 종합해 보면, ‘사회 현상에 대한 우리의 마음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 고민해 볼 수 있는 콘텐츠’가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이러한 콘텐츠들을 볼 때마다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관점으로 하나의 주제를 바라보게 되고, 심지어는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앞으로는 어떠한 태도를 취하면 좋을지 재고해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콘텐츠들이 앞으로는 더 많이 생산되고, 또 이전보다 더 높은 빈도로 대중들에게 비쳤으면 하는 마음이다. 경쟁이 과열된 사회에서 낭만이 사라져가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라지만, 각자의 마음에 최소한의 인류애는 남아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사람들이 그러한 감정들을 이런 콘텐츠들을 통해 차차 깨워주길 희망하고.
놓치고 있는 것들이 많다. 빠른 속도로 삶을 살아가다 보니 그저 지나치기만 하는 것들이 늘어났다. 좋지 않은 현상인 걸 알면서도 무시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콘텐츠들을 다양하게 접하며 주변을 둘러볼 수 있게 됐다. 개인의 이익보다는 함께 하는 것에서 오는 행복이 어떠한 의미를 주는지 깨닫게 되고,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만 같았던 타인의 생각도 인정할 수 있게 됐다.
미디어의 힘은 생각보다 크다. 사랑이 담긴 생각과 말은 생각보다 더 다정하다. 그만큼 영향력도 강하다. 좋아하는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게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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