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를 위한 이야기’ 로 풀이되는 동화(童話)는 그 의미처럼 순수하면서도 신비롭다.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를 통해 미루어 볼 때, 동화는 공상적, 서정적, 교훈적인 세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다. 노래하는 일이 본업이라 할 수 있는 아이돌은 이러한 동화의 속성들을 음악에 구현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이 어떠한 노래의 선율 속에, 어떠한 메시지를 실었는지 살펴본다면 은연 중에 동화의 세계로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햇살 좋은 오후 나른히 넘긴 책장 속 예쁘고 이상한 그림 문득 손이 멈춰졌어요
날 보고 살랑살랑 빨리 오라오라 손짓해
-레드벨벳, Huff n Puff 中
널 찾아간다 추억이 보낸 팅커벨 따라나섰던 네버랜드
그 곳에 내가 너와 바라보며 웃고 있어
-엑소, 피터팬 中
일례로, SM 엔터테인먼트 아티스트의 곡들은 매번 컨셉과 세계관에 많은 공을 들여 제작되는 만큼 오늘 다룰 동화 컨셉의 노래의 다수를 차지한다. 레드벨벳의 ‘The red- the 1st album’은 전반적인 앨범의 컨셉 자체가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해당 앨범의 수록곡인 레드벨벳의 ‘Huff n Puff’를 듣고 있으면, “보라색 하늘과 분홍의 시냇물”이 존재하는 초현실의 공간에서, 채셔 고양이를 따라가는 호기심 많은 앨리스가 된 듯한 느낌이 든다. 그 밖에도, 엑소의 ‘피터팬’을 들으면 금방이라도 청자들의 추억 저편에 존재하는 저마다의 ‘네버랜드’를 꺼내어 펼칠 수 있을 것만 같다.
동상이몽(同床異夢): 같은 동화로 다른 의도를
피노키오
© Disney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지는 캐릭터하면 바로 떠오르는 동화는 단연 ‘피노키오’다. 온앤오프의 ‘제페토’와 에프엑스(f(x))의 ‘피노키오(Danger)’는 모두 주인공인 ‘피노키오’에 주목하여 이야기를 전개하나, 피노키오의 주요 속성인 ‘거짓말’에 집중하고 있지 않으며 화자도 다르다. 원작에서 ‘파생된’ 이야기들을 담은 앨범 ‘Spin-off’에 수록된 ‘제페토’는 피노키오의 입장에서 자신을 만든 제페토 할아버지에게 갖는 의문을 묘사한다. ‘나는 어떤 존재일까 혼란스럽기만 해 내 자신을 더 알고 싶어’와 같은 가사를 살펴보면, 이때의 의문은 인형과 사람의 경계에 있는 화자의 자아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화자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지는 않았다는 점에서는 인형에 가깝다. 그렇지만, 사랑과 아픔을 입력하면 각각 행복과 슬픔이 출력되는 기계적인 흐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처럼 사랑으로 인해 복합적인 감정을 느낀다.
반면에, ‘피노키오(Danger)’는 도리어 피노키오를 만드는 제페토와 흡사한 ‘소녀’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피노키오가 나무 겹겹이 구성된 피조물이라는 점을 미루어 볼 때, 화자가 마음에 드는 대상을 피노키오에 대응시키고 있는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좋아하는 대상의 껍질을 벗겨내는 것은 그 사람을 ‘분석’하는 것이고, 꺼내보고 다시 조립하는 것은 그 사람을 자신이 바라는 모습으로 변화시키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점은 소재 측면에서 직접적으로 피노키오의 이야기를 차용한 ‘제페토’와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제페토’는 개러지 하우스 비트에 날카로운 리듬기타를 베이스[1]로 두었다. 이 중에서도, 효진 파트 선율속의‘accidental’이 비교적 심오하면서도 혼란스러운 피노키오의 내면을 잘 설명해준다. 그러나, ‘피노키오’는 피노키오를 화자의 이상형에 부합하는 모습으로 만들고, 사랑에 빠지는 말괄량이의 발랄함을 살리기 위한 일렉트로닉 팝 댄스 장르를 택했다. 전자와 비교했을 때 후자의 비트와 기타 사운드가 더 강렬하다. 그 밖에도, 후자는 에프엑스 초반 곡들에 드러나는 다소 크리피한 가사의 기조를 확실히 보여주는 만큼 ‘공상적인’ 동화의 속성이 드러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캔해 징징윙윙 칼날보다 차갑게 그 껍질 벗겨내
조각조각 땃따따 부셔보고 땃따따 맘에 들게 널 다시 조립할 거야
-f(x), 피노키오(Danger) 中
어린 왕자
© Antoine de Saint-Exupéry
‘별이 아름다운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꽃 한 송이가 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 필요한 존재가 되는 거야. 나한테 너라는 존재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거고, 너한테 나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여우가 되는 거니까.’
같은 동화의 다른 대상에 주목한 오마이걸의 ‘B612’와 려욱의 ‘어린왕자’는 생택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는 주제와 곡의 구성 측면에서 모두 앞서 살펴본 사례보다는 공통점이 부각된다. 전자는 “뾰족한 가시”를 지니고 정원에 핀 “너의 유일한 친구이자 연인”인 장미의 입장에서 어린 왕자와 그를 둘러싼 세상을 바라보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작에서 장미는 허영심이 강하여, 자신이 사랑하던 어린 왕자에게 특별 대우를 요구하는 등 사랑을 서툴게 표현한다. 가사에서는 이러한 장미에게 ‘부끄러움’이라는 긍정적인 속성을 투영하여 바라본다. 해당 곡은 팬송이기도 한데, 이는 장미가 어린 왕자와의 인연을 “먼 우주를 돌아 만난 기적”으로 여기는 점과 연결시킬 수 있다. 오마이걸의 팬클럽 이름이 ‘미라클’인 것도 해당 곡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후자는 사랑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어린 왕자의 위로를 상기하면서도 여전히 이루어지지 못해 애절한 사랑을 이어 나가는 내용을 담았다. 이때, 가사 ‘네가 날 기르고 길들이면 우린 서로 떨어질 수 없을까’는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해준 말과 대응된다. 후반부에는 “너에게 길들여져 누구도 볼 수가 없을” 만큼 대상을 향한 감정이 커진 화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밖에도, 특히 사람이 사람의 맘을 얻는 일이라는 게 가장 어렵다는 것, 장미꽃이 소중한 이유는 피우려 애쓴 간절함 때문이라는 내용은 원작 동화의 내용과 많이 닮아 있어 어린 왕자의 교훈적인 목소리로 읽히는 듯하다.
이처럼, 두 곡은 ‘사랑의 소중함’을 주제로 하면서도 공통적으로 잔잔한 멜로디로 흘러간다는 점에서 동화의 서정성이 돋보인다. 전자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템포에 저명한 스웨덴 기타리스트 연주를 직접 녹음한 것을 바탕으로 한다. 이때, 가사 ‘네가 나를 살펴보면 난 더 부끄러워 움츠러들고 있어 / 조심스러운 나의 맘과 뾰족한 가시까지’에서 두드러지는 유아와 비니의 몽환적인 중저음 음색은 선율에 더해지면서 소행성 B612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조성한다. 후자는 려욱의 음색이 돋보이도록 무반주의 도입부에서 시작해서 현악기의 소리로 인해 점차 더 화려해지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는 격양되는 화자의 감정을 표현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인어 공주
© Disney
이른 햇살이 녹아 내린다 너를 닮은 눈부심이 내린다
길을 잃은 내 눈은 이제야 Cry cry cry
-엑소, Baby don’t cry(인어의 눈물) 中
대중적으로 알려진 내용을 기준으로 할 때, 왕자를 살리기 위해 주인공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 대표적인 비극의 동화는 ‘인어공주’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다룬 곡들 중 선별된 것들은 해당 소재가 가사에 활용된 것이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엑소의 ‘Baby, Don’t cry(인어의 눈물)’이 전자에 속하고, 레드벨벳의 ‘Automatic’이 후자에 속한다.
엑소의 ‘인어의 눈물’은 모든 사실을 깨달은 왕자의 입장을 상상해본 결말의 뒷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다. 청자들은 왕자를 차마 칼로 찌르지 못해 물거품이 된 인어에게 망설이지 말고 심장을 거두어 갔어야 한다고 외치는 애원, “엇갈릴 수밖에 없는 만큼 더 사랑한” 인어의 마음에 대한 깨달음, 마음이 향할 대상을 잃고 이제야 흘리는 눈물을 통해 장면들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된다. 이 곡을 음악적으로 살펴본다면, 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다룬 만큼 애절한 피아노 선율이 돋보이는 미디엄 템포의 R&B이다.
레드벨벳의 ‘Automatic’은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인어가 사랑에 빠진 상황을 묘사한 노래라고 한다. 이를 미루어 볼 때, 가사 속 “매일 기다리던 환상”이란 바깥 세상을 궁금해하며 사랑을 꿈꾸던 인어 공주의 소망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잠시 흐트러진 소리가 너를 닿아 사랑이란 진실을 모두 말하게 됐어”의 경우에는 동화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키지는 않더라도, 인어에게 ‘목소리’는 사랑을 이루기 위해 맞바꾼 소재인 만큼의 중요성을 지닌다. 어쩌면 사랑은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숨길 수 없는 것임을 드러내는 듯하다. 가사를 돋보이게 하는 몽환적인 분위기는 그루비한 드럼 비트를 사용한 어반 장르의 곡과 멤버들의 보컬의 합으로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
동화의 반전
동화의 영단어는 ‘fairytale’이다. 어원에도 ‘요정’과 ‘이야기’가 결합된 만큼 동화가 환상성이 부각되는 장르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는 마냥 아름다운 것들만을 포괄하는 장르는 아니다. 일명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찾는 소비자층도 있지 않은가.
아이유의 ’잔혹동화’는 “찾는 길이 험해서 헤매게 하는” 라푼젤, 화자가 눈물 한 방울씩을 흘리듯이 “빵 조각을 흘려 두는” 헨젤과 그레텔, 12시 종이 치면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신데렐라, ‘물거품’을 상징하는 인어공주와 ‘토끼굴에서의 이 밤이 지나면 꿈에서 깨게 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다섯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곡에서 다뤄지는 이야기 자체가 잔인한 것은 아니지만, 냉담한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동화 속 세상으로의 ‘도피’를 원하는 화자에게는 동화는 오히려 잔혹한 것이라고 읽힌다.
한편으로는 가사와 별개로 노래가 자아내는 분위기를 통해서 잔혹동화의 내용을 연상하는 청자들도 있다. ‘잔혹동화’는 3박자 계열의 단조 조성 음악이다. 가요계에서 드물게 사용되는 왈츠 리듬[2] 에 화려한 도입부의 합창 코러스, 스산한 느낌의 음색이 곡의 오묘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죽은 백설공주에게 키스한 왕자, 마녀를 오븐에 넣은 헨젤과 그레텔의 잔인함이 떠오르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아이돌의 음악은 가사가 없는 노래, 멜로디가 없는 서정 갈래에서는 보여줄 수 없는 장점을 갖는다. 작곡가와 작사가의 관점에 따라 다른 포커스를 바탕으로 창작된 노래들이, 개성 있는 음색으로 구현되어 저마다 ‘작품’으로서의 매력을 지닌다. 원작에서 일련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동화’ 컨셉의 이점을 활용한다면 컨셉과 노래가 만나 이루는 시너지를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곡들 이외에도, 동화 컨셉의 아이돌 노래를 접하면서 그 한 폭의 장면 속에 우리를 담아 보자.
참고
[1] https://www.melon.com/album/detail.htm?albumId=10474144(곡의 구성을 언급하는 구절들에서 앨범 소개 내용을 참고함. 이후 동일한 방식으로 인용할 때의 구체적인 서지 사항은 생략함.)
[2] 아이유, 아듀무대서 ‘잔혹동화’ 퍼포먼스 “소장가치 1000% 영상” 극찬.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1103142142k(입력일 2011.03.14 / 검색일 202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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